맥켈란(Macallan)의 탄생 배경
위스키는 여러 세기 동안 스코틀랜드에서 증류되어 왔지만, 19세기 초까지도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세금의 꾸준한 인상은 대부분의 위스키 제조업체들을 지하로 몰아넣었고, 이는 부분적으로 영국 왕실에 대한 저항으로도 작용했습니다. 그 결과, 수천 개의 불법 증류기를 작동하는 수백 개의 증류소가 전국에 생겨났습니다. 증류기는 종종 교묘하게 위장되어, 광활한 북부 국가의 바위와 붓 사이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 장소들 중 많은 곳이 스코틀랜드의 증류소들에게 중요한 장소로 남아 있었습니다. 발각되기 전에 위스키를 서둘러 생산하기 위해 그 비밀스러운 증류주들은 맑은 술을 생산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스피사이드 지역의 글렌리브트라고 알려진 지역에서 생산된 위스키는 더 높은 품질로 인정을 받았고 후에 심지어 조지 4세가 가장 좋아하는 위스키가 되었습니다.
세금을 없애고 부담이 덜한 면허 제도를 도입하라는 압력이 거세지기 시작했습니다. 고든 공작(Duke of Gordon)은 이 대의의 옹호자가 되었고, 1823년에 소비세법을 공포했습니다. 그 법에 따라 증류소는 연간 10파운드의 수수료와 갤런당 더 적은 관세를 받는 대가로 운영 허가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면허를 이용한 최초의 증류소는 글렌리브트 증류소 (Glenlivet)라고 알려진 곳을 설립한 조지 스미스 (George Smith)였습니다.
또 다른 증류소가 지하에서 모습을 드러냈는데, 1824년에 알렉산더 리드 (Alexander Reid)가 Craigellachie 마을에 있는 Spy 강을 내려다보는 작은 언덕에서 조업할 수 있는 면허를 취득했습니다. 이듬해, 리드는 자신의 회사인 Alexander Reid Co. 를 설립하여 1847년 사망할 때까지 증류소의 수장으로 남아있었습니다. 리드의 뒤를 이어 Alexander라는 이름의 아들이 이어졌는데, 그는 1858년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회사를 이끌었습니다.
맥켈란, 여정의 시작
한편 리드는 파트너인 제임스 데이비슨 (James Davidson)과 1848년부터 회사에 진출한 제임스 시어러 프리스트를 인수했습니다. 옥수수 상인으로 재산을 모은 제임스 데이비슨은 결국 증류소의 유일한 소유자로 떠올랐습니다. 데이비슨은 당시 크레이그엘라치 (The Craigellachie)로 알려졌던 위스키를 증류하기 위해 고급 보리만을 구입하는 정책을 도입한 것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868년 데이비슨이 사망한 후, 증류소 운영은 제임스 스튜어트 (James Stuart)에게 임대 계약으로 넘겨졌습니다. 이 지역에서 다수의 증류소를 소유하고 운영하기 시작한 스튜어트는 1886년에 맥캘란(Macallan) 증류소를 직접 구입하게 됩니다. 장기 불황은 1870년대 글렌 로데스에서 새로운 증류소를 건설하는 데 더욱 몰두했던 스튜어트를 재정적 어려움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출처에서 도움이 나왔습니다. 1879년, 프랑스 포도나무는 필록세라 해충에 의해 타격을 입었고, 이는 그 나라의 포도밭 대부분을 파괴했습니다. 10년 이상 동안 영국에서 브랜디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스코틀랜드 위스키에 대한 관심의 급증으로 이어졌습니다.
1970년대 싱글몰트 붐이 일다
맥켈란의 근대 시기는 1892년 로데릭 켐프(Roderick Kemp)가 맥캘란 증류소의 새 주인으로 등장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증류소를 사들인 후, 켐프는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글렌리벳 지역에 위치한 것을 강조하기 위해 회사 이름을 R. 켐프 맥켈란-글렌리벳(R. Kemp Macallan-Glenlivet)으로 변경했습니다. 켐프는 이후 맥캘란 증류소를 재건하고 새로운 창고 시설을 추가하며 회사의 증류기와 건물을 개선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켐프는 세기말까지 계속 개선하여 맥캘란의 생산을 확장했습니다. 켐프는 또한 고장 나지 않은 스페인산 오크 셰리 통에서만 위스키를 숙성시키는 것을 포함한 회사의 품질 표준 대부분을 개발했습니다. 비록 켐프는 1909년에 사망했지만, 켐프 가족은 1990년대까지 증류소를 지배했습니다.
스카치위스키 시장은 대부분 블렌디드 위스키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블렌더들은 증류기에서 위스키 재고를 구입했으며, 일반적인 위스키 한 병은 종종 다양한 종류의 위스키를 블렌딩 했습니다. 맥캘란은 블렌더들이 많이 찾는 상품이 되었고, 블렌더들은 맥캘란을 블렌딩에 최상급 풍미를 제공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1960년대, 특히 1970년대에 전 세계의 소비자들이 싱글 몰트의 더 미묘한 맛을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바뀌었습니다. 적절하게 숙성된 싱글몰트 위스키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장기간의 재고 누적은 대부분의 증류주들이 오랫동안 기피하는 사치품이었기 때문에 관심이 급증하면서 대부분의 증류주들은 허를 찔렀습니다. 그러나 맥캘란 증류소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이미 위스키의 상당 부분을 비하는 정책을 시행했고, 그보다 훨씬 전인 1926년부터 위스키를 가득 채운 통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량의 93%에 달하는 대부분이 블렌더에 팔리게 되었습니다.
전통을 고집하며 싱글 몰트의 대명사로 성장
싱글 몰트 위스키에 대한 관심의 증가와 블렌디드 위스키 판매의 침체는 1960년대 중반 맥캘란- 글렌리벳 생산을 강화하도록 격려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는 수공예로 제작된 작은 놋쇠 증류기 사용을 포함한 전통적인 증류 방법을 유지했습니다. 더 큰 규모의 산업용 증류기로 전환하는 대신, 이 회사는 부지에 새로운 증류기를 추가하기 시작했으며 1965년에는 증류기의 수를 두 배인 12개로 늘렸습니다. 이 회사의 추가 확장 계획에는 재정적 지원이 필요했습니다. 1968년 이 회사는 주식을 정리하는 데 자금을 조달하고 확장 드라이브를 계속하기 위한 조치로 상장했습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이 회사의 투자자 중에는 동료 스코틀랜드 그룹 하이랜드 증류소, 프랑스의 레미 코인트뢰, 일본의 산토리가 포함되었습니다. 공모 수익으로 매캘런-글렌리벳은 새로운 증류기를 추가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이는 처음으로 100만 갤런 이상의 생산량을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회사는 1968년 8억 2,200만 파운드 이상의 매출을 올리며 마감했습니다.
1970년에 회사 이름을 Macallan-Glenlivet로 바꾼 후, 회사는 새로운 세대의 증류기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1974년에 6개의 증류기를 추가했습니다. 다음 해에 회사는 3개를 추가하여 총 21개의 증류기에 도달했습니다. 1975년 말까지 회사의 매출은 처음으로 100만 파운드를 돌파했습니다. 증가하는 수요에 대응하여 맥켈란-글렌리벳은 대출을 주선하여 생산을 늘리는 동안에도 재고를 더 많이 비축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때까지 회사의 위스키는 이미 세계적인 청중을 끌어들이기 시작했고, 1977년까지 200만 파운드를 돌파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증가하는 명성을 활용하기 위해, 회사는 The Macallan이라고 불리는 첫 번째 공식 브랜드 싱글 몰트를 출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출시는 즉각적인 성공이었고 The Macallan은 전 세계의 싱글 몰트 카테고리의 주요 홍보대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 단일 맥아 판매의 성장은 수집가들의 시장에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Macallan은 특히 그룹의 소중한 60년 라벨의 첫 번째 병이 출시되면서 즉시 가장 수요가 많은 라벨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세기,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바탕으로 다양한 회사에 인수
한편 주류 업계는 새로운 대통합의 시대에 접어들었고, 1990년대 초에는 소수의 주요 그룹이 주류 시장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맥켈란-글렌리벳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이러한 통합 경쟁 바깥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주요 업체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틈을 이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1994년 회사는 하이랜드 증류소(Highland Distillers)와 유통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이 되자 업계에서는 강력한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는 추세가 회사를 덮쳐왔고, 그때까지 켐프 가문의 지분은 약 20%로 떨어졌습니다.
하이랜드 증류소는 맥켈란-글렌리벳의 지분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1996년 1월, 하이랜드는 급성장하고 있는 그룹 간의 1990년 상호 지분 소유 계약 동안 가지고 있던 26퍼센트의 지분을 레미 코인트로(Remy Cointreau)로부터 인수했습니다. 1996년 7월, 하이랜드는 이번에는 일본의 산토리와 함께 하이랜드가 보유한 맥켈란의 26퍼센트와 산토리의 25퍼센트를 새로운 합작회사인 HS 증류소에 넘기는 두 번째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하이랜드는 HS 증류소의 지배 지분을 유지했고, 산토리는 조용한 파트너 역할을 하며 매캘런의 일본 내 유통을 보장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매캘런의 51퍼센트를 보유한 이 새로운 회사는 즉시 맥켈란의 남은 지분 49퍼센트를 인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세계 최고의 싱글 몰트 중 하나인 마칼란은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블렌디드 위스키 브랜드인 하이랜드의 'Famous Grouse'에 합류하게 됩니다.
10년 말 하이랜드가 인수 투기의 대상이 되는 듯했습니다. 이에 맞서 회사는 증류부터 블렌딩, 병입까지 다양한 사업을 영위하는 스코틀랜드의 개인 소유 회사인 에드링턴 그룹(Edrington Group)에 인수되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특히 에드링턴은 하이랜드의 유명한 그라우스를 블렌딩 하는 데 필요한 곡물 위스키 재고의 원천이었고, 두 회사는 이미 상당한 교차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하이랜드 자체가 에드링턴으로 사라졌지만, The Macallan은 새로운 에드링턴의 핵심 브랜드 중 하나로 부상했습니다. 에드링턴 아래에서, The Macallan은 기존의 명성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1999년에 15년과 30년 제품을 포함하여, 많은 새로운 라벨들을 발표했습니다. 그 출시는 2000년에 새로운 50년 라벨의 발표와 함께 이어졌습니다. 그동안,그 그룹의 한정된 60년 된 스카치에 대한 수요가 계속해서 증가하여, 회사가 보유한 경매 가격이 병당 20,000달러를 넘었습니다.
맥켈란의 미래
전통에서 나아가 Macallan Edition 시리즈의 출시는 다양한 술통 유형과 숙성 기술을 실험하려는 브랜드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이 시리즈는 독특한 향미로 위스키 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뿐만 아니라 역동적인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려는 맥켈란의 비전을 암시합니다. 맥켈란은 계속해서 업계 표준을 설정하고 새로운 표현을 탐구하는 동시에 기존의 유산을 정의한 확고한 품질을 유지하는 미래를 꿈꿉니다.
맥켈란은 정신적 고향인 크레이겔라치 증류소와 소형 증류기를 통한 증류 전문성, 최상의 컷을 위한 세심한 기술에 대한 자부심, 최상의 오크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매력적인 풍미와 빛깔, 천연의 색을 내기 위한 새로운 위스키 원액과 일관성 있는 장인정신, 그리고 위스키가 만들어지는 장소와 과정, 만드는 사람들의 열정을 아우르는 탁월한 맛과 향을 철학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싱글 몰트 위스키의 태피스트리에서 맥켈란은 증류 기술과 완벽 추구에 대한 증거로 우뚝 서 있습니다. 19세기 소소한 시작부터 글로벌 아이콘으로서의 현재 위상까지, 맥켈란의 여정은 공예에 대한 확고한 헌신과 끊임없는 우수성을 추구하는 과정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야기가 담긴 과거를 향해 잔을 들어 올리면서 아직 쓰이지 않은 남은 챕터들을 흥분된 마음으로 기대합니다. 전통과 혁신에 뿌리를 둔 맥켈란의 미래 비전은 전 세계 위스키 애호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것이며, 한 모금마다 그간의 역사, 시간, 기술, 그리고 장인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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