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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기업 창업 스토리

골프 혁신의 기원, [TaylorMade]의 탄생과 성장 여정

by 칼렘 2023.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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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기원 - 테일러메이드 (TaylorMade)의 탄생

테일러 메이드는 게리 아담스(Gary Adams)라는 기업가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테일러 메이드 메탈우드라는 제품은 전 세계적으로 골프의 면면을 바꿨습니다. 십자군 시대부터 19세기 산업화 사회가 시작될 때까지 골프 장비의 발전은 거의 정체되어 있었습니다. 전 세계 골프 선수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새로운 부류의 골프 선수인 전문가들이 수백만 달러의 구매를 놓고 경쟁했던 골프의 현대 시대에 기술적인 변화가 발생하는 속도는 확실히 더 빨라졌습니다. 골프는 점점 수익성이 높아지고 있는 시장을 지배하기 위해 제조업체들이 경쟁하면서 큰 사업으로 진화했습니다. 골프는 마스터하기 어려운 게임이었고 기술적인 개선을 이루기 어려운 게임이었습니다. 많은 혁신은 시장 도입 이후 비참하게 실패했지만, 고객을 이기고 프로 등급의 승인을 충족시키는 소수의 발전에는 보상이 지속적이고 중요했습니다. 테일러 메이드는 전 세계 골프 선수들의 신뢰를 얻은 혁신적인 제품으로 골프 산업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제조업체 중 하나였습니다. 그 혁신의 공로는 회사를 만든 게리 아담스에게 돌아갔습니다.

나무에서 메탈로, 우드의 변화를 가져오다

애덤스가 운명적인 실험을 시작하기 약 10년 전, Surlyn으로 덮인 투피스 골프공이 시장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 골프공은 스포츠 역사상 어떤 공보다 더 멀리 이동했고, 골퍼에게도 즉각적인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투피스 골프공은 빠르게 골프 대중과 프로 모두에게 선택의 공이 되었고, 골프 용품 산업에서 성공으로 이어진 한 가지 이점인 거리를 제공했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 애덤스가 골프채를 만드는 데 필요한 다른 재료를 실험하기 시작했을 때 추구했던 목표는 비거리 증가였습니다. 애덤스는 금속으로 만든 클럽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나무 클럽보다 더 먼 거리를 이동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선구적인 작업의 본질을 이룬 애덤스는 최초의 프리미엄 메탈우드 드라이버를 디자인했고, 그의 창작품인 테일러 메이드 골프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회사를 설립하여 이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특허를 받은 스테인리스 스틸 테일러 메이드 메탈우드 클럽은 1979년 미국프로골프협회(PGA) 상품 박람회에서 대중에게 처음 선보였습니다. 놀랄 것도 없이, 박람회의 구매자들은 그 새로운 클럽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습니다. 골프 산업의 기술적인 변화는 빙하기의 속도로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회의론자들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신생 회사가 만든 이상하게 생긴 클럽들을 시도한 사람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지만, 애덤스는 자신의 신생 회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그가 특정 유형의 골프 선수들에게 메탈 드라이버가 전통적인 클럽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확신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골프 세계에서, 전문가들은 모든 제조업체의 성패를 좌우하는 지배층이었습니다. 덜 숙련된 골프 선수들은 전문가를 존경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장비에 주목했으며, 종종 프로 선수들이 선택한 브랜드에 대한 구매 결정에 따라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정 브랜드의 장비를 사용한 특정 선수에 의해 기록된 토너먼트 승리는 골프 산업에서 마케팅의 핵심이었습니다. 한 제조업체의 제품을 승자의 손에 넣었고, 그 제조업체는 다른 경쟁업체들보다 상당한 이점을 얻었습니다. 애덤스는 이 사실을 깨닫고 테일러 메이드의 존재 초기부터 그것을 자신의 주요 목표로 삼았습니다.

 

PGA프로들의 선택, 마케팅의 승리

 

그의 회사가 설립된 첫 해에, Adams는 1979년 PGA 클럽 프로 챔피언십에서 경쟁하는 47명의 프로 선수들에게 테일러 메이드의 메탈 클럽으로 경기하도록 지원했습니다. 테일러 메이드 브랜드와 그 회사의 독특한 메탈 클럽들이 미국의 골프 마니아들 사이에서 첫걸음을 내딛으면서, PGA의 무역 박람회에서 클럽들을 불신하던 회의론자들은 그들의 관점을 빠르게 바꾸었습니다. 1980년 말에 회사의 매출은 테일러 메이드 메탈 클럽이 미국 프로 서킷에서 받고 있는 노출에 힘입어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3년 후에, 메탈 클럽들이 골프 산업 내에 널리 퍼진 현상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은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1983년까지 테일러 메이드 메탈우드는 매주 평균 60개의 테일러 메이드 클럽이 경기를 하는 전국 투어에서 승리했고, 결과적으로 미국 전역의 프로 샵과 소매점에서 매우 인기 있는 아이템이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앞으로, 메탈은 골프 클럽을 제조하는 데 사용되는 선호되는 소재였습니다. 애덤스의 선구적인 작업은 자리를 잡았습니다.

 

스키장비 업체 살로몬의 인수로 시너지를 키우다

예상대로 일단 골프 대중이 메탈 클럽을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때 다른 제조업체들도 테일러메이드의 선례를 재빨리 따라갔습니다. 동시에 업계의 리더이자 새로운 금속 시장에서 상당한 우위를 점하고 있는 테일러메이드는 다른 회사들에게 탐나는 회사가 되었습니다. 테일러메이드가 메탈 클럽을 업계의 표준으로 만든 직후, 양쪽 모두에게 유익한 기업 결합이 이루어졌습니다. 1984년 프랑스 스키 장비 제조업체 살로몬 (Salomon S.A.)는 테일러메이드를 인수하여 회사를 완전히 소유한 수많은 자회사 중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살로몬에게 골프 시장으로의 진출은 유망했고, 테일러 메이드에게는 살로몬의 강력한 기업 지원 아래에 재정적인 지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스키 업계의 거물인 살로몬은 사업 5년 차에 운영되는 독립적인 회사로서 테일러 메이드가 이끌어 내기를 바랄 수 없는 훨씬 더 큰 재정적 자원을 소유한 재정적 여유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살로몬은 테일러 메이드가 특허를 받은 금속 클럽을 통해 초기 성공을 구축하려고 시도했던 연구 개발에 대한 유산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테일러 메이드는 금속 클럽 시장에서 선두를 유지하고 나중에 발전을 이끌 추가적인 혁신을 개발하기 위해 훨씬 더 큰 동맹의 지원을 필요로 했습니다.

 

살로몬 인수 당시 테일러 메이드의 메탈 클럽들이 시장의 승자로 보였지만 이 회사는 여전히 미국의 프리미엄 골프 클럽 제조업체로 등극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장애물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장애물은 1980년대 중반 회사의 대표적인 메탈 클럽이 프로 투어에서 사용되었을 때 극복되었습니다. 1984년 테일러 메이드 메탈우드 드라이버는 골프의 주요 대회 중 하나인 1984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 시 사용되었습니다. 이듬해 캐나다 오픈, 혼다 클래식 및 파나소닉 라스베이거스 인비테이셔널을 포함하여 테일러 메이드 클럽을 사용하는 선수들이 기록한 일련의 승리로 인해 회사의 시장 지위가 상당히 강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승리들이 연결고리에 기록되고 있었기 때문에 테일러 메이드는 새로운 제품 라인을 도입하고 제조 운영을 통합함으로써 앞으로 수년간을 준비했습니다. 이 회사의 새로운 버너 및 버너 플러스 드라이버는 1980년대 중반까지 PGA 서킷에서 사용되는 가장 인기 있는 클럽으로 순위를 매겼고, 힐 앤 토 웨이트로 구성된 새로운 퍼터 라인은 회사가 서부로 이주한 1985년에 데뷔했습니다. 애덤스가 회사를 설립한 일리노이에 본사를 둔 테일러 메이드는 미국 골프 클럽 생산의 중심지인 캘리포니아 칼즈배드에 제조 시설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1985년 이 회사는 일리노이 사무실을 폐쇄하고 미국 최대 골프 클럽 생산업체가 위치한 칼즈배드에 있는 생산 공장과 통합했습니다. 이전 2년 후, 칼즈배드에 새로운 90,000 평방 피트의 생산 공장 건설이 완료되었으며, 이로 인해 회사는 골프 클럽에 대한 꾸준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제조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성장 여정 - 프리미엄 메탈 우드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다

1980년대 초중반은 혁신적이고 매우 인기 있는 클럽들이 강력한 브랜드 인지도에 힘입어 작은 신생 기업에서 강력한 경쟁자로 회사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면서 테일러 메이드를 골프 산업에서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1980년 상반기 동안 회사의 발전을 묘사한 활동의 붐은 10년 후반 동안 다소 누그러졌습니다. 새롭고 눈길을 끄는 클럽 라인의 개발이 부진하며 상승은 부족했습니다. 테일러 메이드의 경영진은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프리미엄 메탈우드 및 버너 브랜드와 같은 열광을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클럽 라인을 추가했습니다. 회사가 1990년대 중반에 추가적인 노력 없이도 더 빠르게 스윙할 수 있는 혁신적인 샤프트를 갖춘 새로운 버너 버블 드라이버를 선보였을 때, 업계 전문가들은 특히 버너 버블 시제품이 조지아주 오거스타에서 열린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최초의 메탈우드가 된 후 테일러 메이드의 사업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회사는 1995년에 새로운 버너 버블 클럽의 출시를 준비했기 때문에 새로운 라인이 회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습니다. 회사의 마케팅 부사장이자 미래의 리더인 조지 몽고메리는 테일러 메이드가 "약 3년 동안 정체되어 있었다"라고 인정하고 버너 버블 드라이버들에게 가능한 한 큰 기대감을 심어주려 했습니다. 1990년대 초 테일러 메이드에 합류하기 전에 시애틀의 K2 회사가 미국에서 선두적인 스키 브랜드가 되는 것을 도왔던 몽고메리는 회사가 "골프 클럽 출시를 위해 할당된 사상 최대의" 예산을 계획했습니다. 광고와 마케팅 지원을 위해 전례가 없는 1,800만 달러가 책정되었는데, 이는 1994년 회사의 총 마케팅 예산보다 50퍼센트나 더 많은 금액이며 1993년에 지출된 금액의 두 배나 많은 금액입니다. 수많은 인쇄물과 텔레비전 광고가 쏟아져 나오면서 버너 버블 클럽이 출시되었을 때, 그 결과는 고무적이었습니다. 그해 국내 매출은 90퍼센트나 급증한 반면, 국제 매출은 50퍼센트나 급증하여 회사에 1995년 총매출 2억 2천만 달러로 추정되었습니다. 몽고메리는 기뻐했습니다. 그는 테일러 메이드의 1996년 마케팅 계획에 대해 "3천만 달러의 예산을 추천합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아디다스에서, 그리고 한국 회사의 품으로

1997년 초 테일러 메이드는 캘러웨이(Callaway)와의 간격을 줄이고 코브라(Cobra)의 잠식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칼즈배드(Carlsbad)에서의 사업을 통합하고 생산 능력을 크게 확장할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확장 프로젝트에는 206,000 평방 피트의 메인 건물, 4,250 평방 피트의 테스트 엔지니어링 실험실 및 6 에이커의 클럽 테스트 범위가 포함되어 칼즈배드에 있는 기존 3개 공장의 용량의 거의 두 배인 연간 400만 개 이상의 골프 클럽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1998년 초에 마무리될 예정이었던 공사는 1997년 3월에 시작되었습니다. 9월에 살로몬(Salomon)은 테일러 메이드와 그 밖의 스포츠 용품 회사들에 대한 지배권을 글로벌 대기업인 아디다스(Adidas AG)에 매각하기로 합의했는데, 이는 테일러 메이드의 내외부 모두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평가되었습니다.

 

15억 3천만 달러짜리 거래가 성사되자 테일러 메이드는 스스로를 아디다스-솔로몬 그룹이라고 부르는 전 세계적인 스포츠 대기업인 새로운 모회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모회사에게 테일러 메이드는 1997년 말에 인상적인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미국 내 금속 우드 리테일 시장 점유율은 25% 증가했고, 아이언 시장 점유율은 거의 30% 증가했으며, 퍼터 매출은 3배 이상 증가했으며, 테일러 메이드의 골프백 매출은 2배 증가했습니다. 회사 사업의 거의 모든 면에서 성장이 만연했으며, 테일러 메이드의 경영진에게 미래에 상당한 가능성이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습니다.

 

이후 2017년에 아디다스는 운동화 및 의류 분야의 핵심 역량에 더욱 집중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의 일환으로 테일러메이드와 애덤스(Adams) 및 애시워스(Ashworth) 브랜드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매각은 같은 해 사모펀드 KPS Capital Partners가 테일러메이드를 인수하면서 완료되었습니다. 이후 2021년 테일러메이드 골프는 또 한 번의 소유권 변화를 겪었습니다. 한국의 사모펀드 센트로이드투자파트너스가 KPS캐피털파트너스로부터 테일러메이드를 인수하였습니다. 이번 인수는 테일러메이드가 한국 기업의 소유권을 갖게 되는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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